블로그 이미지
지상 최고의 카이사르 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 곳은 승보기의 세상살이를 꾸며 놓은 곳입니다 편하게 놀다 가시길~
이승복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total
  • today
  • yesterday

'동경시부야'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06.23 일본 시부야의 하찌코 동상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본의 동경에서 가장 번화하고, 젊은이들이 많은 곳을 들라고 한다면 누구나 시부야(渋谷)를 꼽을 것이다.

 
동경 전철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야마노테선의 거점이기도 한 시부야역 바로 앞에는 만남의 장소로 잘 알려진 하치코라는 개의 동상이 역을 향해 서 있다.

전철 역 앞에 하필 개동상이 서있을까 의아해지기도 하지만 이 하치코동상에는 눈물 없이는 보고 들을 수 없는 기가 막힌 사연이 깃들어 있다. 자신을 아껴주던 주인이 죽은 후 10년 동안이나 시부야역 앞에서 주인을 기다렸던 충견이 바로 동상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창 제국주의의 꿈을 키우던 1923년 11월에 본토의 북쪽인 아키타(秋田)현 오오다테(大館)시의 사이토(斉藤)의 집에서 하치코는 태어났다. 개가 태어나자 평소 신세를 많이 졌던 동경대 농학부의 우에노(上野)교수에게 보내야겠다고 사이토우는 생각했다.

두 달 이상 개를 키운 사이토우는 강아지를 쌀섬에 넣어서 1924(1924)년 1월 14일 702호 급행열차에 실어서 동경의 우에노 역으로 보내게 된다. 약 20시간 정도가 걸려서 도착한 강아지인 하치코는 시부야의 우에노교수 집에 도착했지만 몸이 상당히 약한 편이었다.

 
우에노 교수는 지금 동경대학 교양학부가 있는 고마바(駒場)의 농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하치코를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53세였고, 그의 부인은 39세였다고 한다. 그는 양녀인 즈루코 부부와 하녀와 정원사, 서생 등을 식구로 거느리고 있는 큰 부자였다.

시부야 역에서 도보로 약 5분정도 걸리는 세타가야 언덕에 살았던 우에노 교수는 아키타 개를 무척 좋아해서 5마리나 길렀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 개들은 1살이나 2살 정도가 되면 모두 죽고 말아서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고 있었던 때였다. 

 
오랜 여행에 지친 탓인지 개는 그리 건강하지 못했는데, 우에노 교수의 극진한 간호에 힘입어 그해 장마가 끝났을 때는 아주 건강한 개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 년 정도가 지나 성견으로 자란 하치코는 우에노 교수의 출퇴근을 배웅하고 마중하는 충견이 되었다.

우에노 교수를 배웅하는 장소는 두 군데였는데, 하나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마바의 농학부 정문 앞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부야 역이었다. 시부야 역은 야마노테선 역과 함께 시영전철의 종점이 있었던 관계로 하치코는 주인이 가는 방향에 따라서 배웅을 했다.


  아키타개가 자꾸 죽자 우에노 교수는 그 때 포인터 종류의 일종인 John과 S도 키우고 있었는데, John이 하치코를 많이 보살폈다. 하치코가 성견이 된 후에는 세 마리의 개가 함께 교수를 배웅했는데, 하치코가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해서 틀린 적이 없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내리는 날도, 그리고 바람이 부는 날도 어김없이 아침과 저녁으로 주인을 배웅하고 마중하는 그런 일을 일 년 남짓 했을 때 뜻하지 않은 비극이 하치코에게 닥쳐온다.

1925(1925)년 5월 21일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치코의 배웅을 뒤로 하고 학교로 출근했던 우에노 교수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그 날 교수회의를 마친 우에노 교수는 의자에 앉아서 다른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뒤로 넘어져서 사망하고 만 것이다.


  주인의 죽음을 알 턱이 없었던 하치코는 농학부 교문 앞에서 밤이 늦도록 기다렸지만 우에노 교수를 만날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하치코는 주인의 냄새가 배어 있는 유품이 있는 헛간에 들어가 삼일간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앉아 있기만 하였다.

4일째가 되는 25일 저녁에는 우에노 교수의 마지막 영결식이 준비되는 밤이었지만 주인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하치코는 John과 S와 함께 우에노 교수를 맞이하기 위하여 시부야 역으로 나갔다. 그 후로도 늘 마중을 나갔는데, 하치코 혼자인 날이 많았다.


  갑작스런 주인의 사망으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우에노 교수의 부인은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관계로 유산 상속 등의 권리를 가지지 못한 부인은 살림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고, 오카야마(岡山)에 있는 친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편이 사랑하던 개들을 그냥 버릴 수 없었던 부인은 하치코와 John을 옷감장사를 하는 친척인 호리코시에게 맡겼다. 친정으로 돌아가기 전에 시간이 나면 하치코를 보러갔는데, 쇠줄에 묶어놓고 먹이도 제대로 주지 않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옷감을 사러 온 손님을 부인으로 착각한 하치코는 그 집을 나와 버린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갈 곳이 없어진 하치코는 부인에 의해 아사쿠사의 친척에게 맡겨졌으나 하치코를 질투하던 이웃들과 사이가 나빠져서 결국 오래 있지 못하게 되었다.

다시 시부야로 돌아온 하치코는 우에노 교수의 양녀이며 상속자인 지루코의 집에 맡겨졌으나 이전과 같은 발람함도 건강함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교수의 양녀가 하치코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에노 교수 외에는 그의 슬픔을 달래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 집에서 그럭저럭 지내던 하치코는 1927년 가을에는 또 다른 사람의 집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 곳은 교수의 정원사 일을 했던 고바야시의 집이었다. 원래의 주인을 잃어버린 슬픔과 그리움으로 인해 하치코는 어디에 가도 행복해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하치코는 시부야 역으로 교수를 마중 나가는 일을 거르지 않았는데, 그 집에서도 오래 견디지 못하고 가출을 해버린 하치코는 주인 없는 개가 되어서 들개 포획자들에게 쫓기기도 하고, 시부야역의 노점상들에게는 손님을 방해한다고 구박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주인을 기다리고 마중하던 하치코의 행동은 어느덧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신문에 오르내리는 정도가 되었다. 신문 기자들이 하치코의 사연을 전하면서 한쪽 귀가 늘어진 것으로 보아 잡종이라고 한 것이 논쟁을 불러일으켜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하치코의 이런 사연은 일본개보존협회를 조직했던 사이토우(斉藤)가 관심을 갖게 되면서 더욱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는 朝日新聞에 하치코의 사연을 써서 기고를 함과 동시에 동상 건립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금에 동참을 했는데, 이 사연을 전해 들은 미국의 어린아이들까지 성금을 보내왔다. 1934년 3월 10일 오후5시부터 시작된 하치코동상 건립창립회의는 3,000명이 넘은 사람들이 몰려서 1,2,3층을 메우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은 동상건립은 순조롭게 추진되어 시부야역을 바라보는 동상을 장소에 세우기로 하였다. 발기인인 사이토우, 동상을 제작한 안도우, 시부야 역장, 우에노 교수의 미망인인 등이 참석한 동상 건립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동상이 세워진 뒤에도 하치코는 주인을 마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는데, 유랑견이 되어 떠돌던 하치코는 1935년 3월 8일 오전6시 경에 죽은 시체로 발견됨으로서 13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하치코가 죽은 자리는 평상시 잘 가지 않았던 역의 반대쪽으로 역에서 한 참 떨어진 골목길 옆이었다. 유랑견이 되면서 하치코는 개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휘라리라는 병에 걸렸는데, 병균이 심장에 이르면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진단되었다.


하치코의 죽음이 알려지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물려들었는데, 우에노 교수의 미망인 역시 참석하였다. 여러 상장을 걸기도 하면서 사람의 장례처럼 치러진 하치코의 뼈는 화장되어 자신의 주인인 우에노 교수 무덤에 함께 묻였혔다.

한편, 하치코의 시체는 우에노 과학 박물관에 기증되어 박제로 만들어짐으로서 영원한 모습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주인을 마중하는 모양으로 시부야 역을 향해 앉아있는 모습을 취한 하치코의 동상은 그 후에도 또 한 차례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세계 지배를 꿈꾸며 전쟁에 광분하던 일본 제국주의는 연합군의 공세에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는데, 1944년에는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물자부족을 느낀 제국주의자들은 급기야 금속회수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훈령에 따라 하치코의 동상 역시 철거됨으로서 충견을 두 번 죽에게 되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일본이 무조건 망할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는 회고를 하고 있다.   

사람들의 예견처럼 1945년 8월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 후유증으로 시달리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1948년 여름이었다. 현재의 하치코 동상은 1948년에 다시 건립된 것이다.

주인을 섬기고 배웅하며, 마중하는 일을 천직으로 알았던 충견 하치코는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시부야 역 앞에 오늘도 의연히 앉아서 주인을 기다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 사연을 지금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승보기가 하는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다이바 자유의 여신상  (0) 2009.07.09
아사히 방송사옆 잔디밭  (0) 2009.06.29
도쿄 타워~  (0) 2009.06.15
일본가는 비행기에서..  (0) 2009.06.10
아름다운 절, 보탑사  (0) 2008.02.20
posted by 이승복